픽션 없는 사진들을 위한 모험, 그리고 흔적에 대한 책임

유운성 (영화평론가)

장보윤 작가가 새로 준비하고 있는 전시의 표제가 르네 도말의 미완성 소설 『마운트 아날로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건 너무 투명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었다. 인간의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접근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실재하며,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을 통해 인도될 수 있는 ‘유추(類推)의 산’이라는 도말의 환상적 가공물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오)컬트 영화 <성스러운 산>(1973)에서부터 필름이라는 아날로그 시대의 잔여물을 시네마라는 모호한 대상을 가리키는 ­ 혹은 끝내 가리키는 데 실패한 ­ 유추의 기념비로 만들어버린 태시타 딘의 <필름>(2011)에 이르기까지, 이미 적지 않은 시각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던 터다. 동명의 전시와 더불어 제작한 사진과 텍스트가 교차하는 책 『밤에 익숙해지며』(2011/2014)에서 장보윤 스스로가 토로했듯 “더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였기에 결핍된 상태의 것”일 수밖에 없는 (죽은 이들과 알지 못하는 이들의) 사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결핍을 대체할 수 있는 사물, 사람, 사건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유추의 여행’을 감행하는 그녀의 작업이 도말의 인물들의 무모한 모험과 닮아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일은, 내겐 몹시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장보윤 자신의 작업과 도말의 인물들의 모험 사이에 모종의 유비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 점은 작업을 추동하는 내심으로 간직할 수는 있을지언정 이처럼 투명하게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그녀가 준비한 일련의 사진들(우연히 발견한 사진들과 그녀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과 텍스트들(「마운트 아날로그」와 「시간은 흐른다」)과 영상작업(<만남의 장>)을 차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장보윤의 사진들, 무엇보다 그녀가 우연히 습득한 사진들의 특징은 그 특징 없음에 있다. 경주와 같은 관광지를 방문한 이들이 으레 찍곤 했던 기념사진들 틈에 카메라 테스트 도중 혹은 아예 실수로 잘못 찍힌 기술적으로 형편없는 사진들이 함께 섞여 있기도 하다.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에 나선 소녀가 남몰래 흠모하던 소년을 몰래 찍은 것으로 작가가 추정하는 사진이 섞여 있기도 하다. 주인을 잃어버린 이들 사진은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이라면 무엇이건 가차 없이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각인시켜 버리는 사진의 ‘증거 능력’을 더할 나위 없이 폭력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증거 능력이란 특별히 인물과 관련해서는 ‘거기 있었음’이라는 과거-존재의 (위장된) 부재의 술어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 사실상 아무 것도 증거하지 않는 벌거벗은 능력에 다름 아니다. 흔히 이 벌거벗음을 감추는 데 동원되는 어떠한 미적 구성도(예술(적) 사진), 어떠한 준선험적 형상의 지시도(브로마이드), 어떠한 감각의 환기도(유머러스한 사진, 광고사진 등에서부터 극단적인 예로 포르노 사진까지) 여기엔 없다. 물론, 우연히 습득한 사진들 가운데 작가가 용의주도하게 이처럼 철저하게 벌거벗은 사진들만을 고른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그 자체로는 그것을 바라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주장하지 못하는 이 진부한 사진들은 인물과 관련된 픽션을 수반하지 않는 사진들 – ‘픽션이 아닌’(nonfiction) 사진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픽션 없는’(fictionless) 사진들 - 이라고 할 수 있다. 장보윤은 자신이 쓴 글들에서 사진을 찍거나 사진에 찍혔으되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로 남지 못한 이들의 부재가 그 사진과 관련된 장소로의 여행을 촉발시켰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여행이란 사실 픽션 없는 사진을 위해 픽션을 찾아나서는 여행이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담담하고 기술적인 어조로 씌어졌지만 돌연 억누를 길 없는 감상을 드러내기도 하는 장보윤의 글들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은, 사진의 멜랑콜리는 그것과 결부된 인물이 사라졌거나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픽션과 맺는 관계가 단절된 데서 비롯된다는 날카로운 인식이다. 그녀에게 있어 “사진 인화지 위에 남겨진 생생한 이미지는 […] 계속해서 어떤 환상 내지 상상을 만들어내도록 부추”기는(「마운트 아날로그」) 것이며 “여행은 […] 존재와 부재의 사이를 오가며 […] 보고 느낀 경험들을 바탕으로 스스로 보다 적극적인 내러티브를 만들 기회를 마련”해 주는(『밤에 익숙해지며』) 것이다. 우리가 그녀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결핍에서 비롯된 감상이 아니라 단절이 추동하는 픽션에 대한 의지다.

이쯤에서 우리는 하나의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연히 습득한 저 범용한 사진들이 인물과 관련해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증거하지 않으면서 ‘거기 있었음’이라는 (위장된) 부재의 술어로만 남아 있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장보윤이 유독 장소와 관련해서는 이 사진들이 모종의 증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듯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것이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사진들과 결부된 (인물이 아닌) 장소를 ‘기어이’ 찾아가는 그녀의 여행은 언제나 “실재와의 사후적 만남만을 용인한 채 종결되고” 마는 절망적인 것이며 “사진을 찍고 드로잉을 그리고 텍스트를 쓰는 재현 행위들은 이러한 절망감을 초극하기 위한 노력들이라 할 수 있다”는 최정원의 지적(『밤에 익숙해지며』에 함께 수록된 「존재의 흔적을 쫓는 여행」)은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것이지만, 사실 만남의 실패 내지는 불가능성은 그러한 여행의 귀결로서 주어지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녀의 여행이 자기충족적(self-fulfilling)으로 수행하고 입증하는 전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발굴 조사로 인해 크고 작은 방수포로 뒤덮여 “검버섯이 핀 거칠고 주름진 늙은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경주의 들판(「마운트 아날로그」)과 그것을 찍은 사진은 그녀가 과거 다른 이들이 찍은 경주의 사진을 보며 이미 예견하고 짐작했을 바의 모습 그대로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무엇을 기대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언제나 그와의 만남이 유예되는 실재가 아니라 범용한 사진들을 새로이 가로지를 픽션이야말로 장보윤의 ‘마운트 아날로그’이고, 그녀의 여행은 그 자체로 픽션의 주위를 맴도는 에크리튀르이고, 사진과 결부된 장소는 픽션의 유추를 가능케 할 가시적이고 실재하는 산기슭이고, 여행의 결과로 나온 그녀의 텍스트들과 사진들은 (그녀와 다른 사람들의) 미래의 또 다른 여행을 위해 지침으로 남겨둔 흔적들이라고 말이다.

“당신이 막다른 길을 만나거나 위험한 곳에 도달하게 되면 […]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당신이 남긴 흔적을 싹 제거하도록 하라. […] 당신이 지나간 곳의 흔적에 대해 당신의 동포들에게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르네 도말은 썼다. 우리는 장보윤이 여행을 통해 성공적으로 픽션에 도달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막다른 길로 인도한 여정의 흔적은 꼼꼼히 지워가면서 저 범용한 사진들과 그것들이 지시하는 장소들을 지침으로 삼아 픽션으로 향하는 걸음을 느릿하게 이어가고 있다 할 수는 있을 터이다. 이는 이런저런 경로로 습득한 타인의 기록물들(사진, 일기, 메모 등등)을 통해 타인의 삶을 재구성하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허구적인 내러티브를 덧입히는 동시대의 어떤 경향 속에서 장보윤이 자신의 미묘한 자리를 찾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영상작품 <만남의 장>이 <모들린 가족 이야기>(세르히오 옥스만, 2012)나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존 말루프 & 찰리 시스켈, 2013)처럼 동네 경매장이나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사진 및 기록물에서 출발해 – 장보윤의 작업 또한 누군가에게서 건네받은 무명인의 사진앨범이나 재개발 구역의 공가에서 찾은 버려진 필름으로부터 출발하곤 했다 – 실제 인물의 삶을 추적해가는 다큐멘터리들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경주에 거주하고 있거나 그곳을 방문한 이들이 검은 배경막을 뒤로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증명사진 찍듯 담아낸 ‘토킹 헤드’(talking heads) 영상물이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은 사실 배우들이며,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실제 인물들의 구술을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작가가 경주 여행 도중에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들려주었을 법한 이야기를 증류하고 가공해 구성한 대본을 바탕으로 배우들의 즉흥적 변주를 가미해 얻어낸 것이다. 때로 분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가 하면 연기하고 있는 중임을 쉬이 짐작케 하는 배우들의 외양과 몸짓은, 작가와 작가가 그 주변을 맴돈 픽션의 고도(高度) 사이의 격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지워버린 흔적과 남겨진 흔적 사이에 있는 이 얼굴-말들은 (불)가능한 픽션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과묵한 여행 가이드의 책임감의 증거가 되고 있다. ■